refer. http://babam.egloos.com/2384470


논문을 쓰고 있는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


1.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논문을 쓴다거나 작성한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논문은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와 생각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논문이라는 어떤 특정한 담론의 장에 필자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담론의 장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참가자들은 더 이상 인격체로서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초대한 사람에 의해 선정된 주제에 대하여 특수한 입장을 대변하는 존재로 추상화되고 사물화 된다. 따라서 논문은 죽은 자들의 대화일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차갑고 건조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논문을 바람직한 글 쓰기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비판이 어느 정도 정당성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논문은 여러 가지 글 쓰기 방식 중에서 하나의 형식이라는 지위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글 쓰기의 다원화와 논문은 서로 대립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양립 가능하다. 이런 입장에서 필자는 아카데미즘이 요구하는 하나의 독특한 글 쓰기로서 논문의 지위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논문이 갖는 특성과 미덕 몇 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논문 작성 요령에 관한 글들은 이미 많은 곳에서 체계적으로 소개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된 입장은 다른 곳에서 제시된 것처럼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석사․박사 논문을 작성하는 학생들이 한번쯤 새겨보았으면 하는 것들을 적은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필자가 몇 편의 석․박사 학위 논문들을 읽는 과정에서 떠오른 생각의 요약인 셈이다.


2. 다른 모든 글처럼 논문에서 제목의 선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논문제목을 선정하는 방법 자체가 학풍뿐만 아니라, 글쓴이의 기질에 따라서 다양하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다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박사학위 논문의 경우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 중요한 개념을 제목으로 정하고, 구체적 내용은 부제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 영미 계열의 경우 제목이 너무 추상적이거나 포괄적인 것을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차이와 무관하게 제목은 무엇보다 간결해야만 하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논문의 주제와 소재, 그리고 논문의 범위를 분명하게 드러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분석철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비트겐슈타인과 관련된 석사학위 논문의 제목, 목차, 그리고 서론을 읽고 그 논문의 본론과 결론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면 이 논문은 주제에 맞는 제목과 목차를 올바로 선정하지 못했거나, 아니며 필자가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글을 읽은 전공학자가 실제로는 비전문가이었을 수는 있지만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제목에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좋지만 혼란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특히 제목에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신비감을 자아내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가능하다면 지양해야할 태도다.


3. 논문은 밀도 있게 쓰여져야만 한다. 논문은 어떤 주제에 관한 해명이나 논증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기술이나 설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올바른 이해와 해석이 요구된다. 이런 맥락에서 석사학위 논문이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조건은 설정된 주제에 따라 원전에 해당하는 주요 텍스트를 세밀하게 읽고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제에 관한 기술과 설명은 근본적으로는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를 해명하거나 논증하는 절차에 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논문을 완성시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석사학위 논문에서 어떤 새로운(또는 다른) 관점이나 해석, 더 나아가 새로운 철학적 이론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선행 연구자들의 논리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잘 정리된 논문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잘 정리된 글이 보고서가 아닌 논문이 되기 위해서는 선행연구와 구별되는 필자의 독특한 재구성이 필요하며, 그 속에 이 논문을 쓰고 있는 필자의 의도와 목적이 담겨있어야만 한다.


4. 석․박사 학위 논문이 언제나 논쟁 중심인 것은 분명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주석에 가까운 글도 훌륭한 논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고전에 대한 주석 또는 해석의 성격을 갖는 논문을 쓸 경우 주의해야할 것은 필자가 텍스트 뒤로 숨어서는 안 되며, 나아가 단순한 자기 이해가 아니라, 다양한 이해와 해석 가능성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대화 가능한 인물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필자가 비트겐슈타인의 종교관에 대해서 논문을 쓸 경우,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중요한 대화 상대자이겠지만, 만일 자신이 쓰고 있는 주제에 관하여 선행 연구자가 있을 경우 이들은 모두 좋은 대화 상대자임에 틀림없다. 석․박사 학위 논문들을 읽다보면, 그것이 논문인지 아니면 설정된 주제에 대한 교양서적이나 교재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대부분은 필자의 대화 상대자가 없는 경우다. 예를 들어 어떤 학자가 비트겐슈타인 철학 전체를 요약 정리하거나 또는 소개할 목적으로 쓴 책에서 한 장으로 그의 종교관을 정리한 것과 비트겐슈타인의 종교관을 논문으로 작성한 경우는 서로 달라야만 한다. 전자의 경우 글을 쓴 필자가 텍스트 뒤로 숨어 있을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필자는 비트겐슈타인뿐만 아니라, 그 문제에 관한 선행 연구자들을 대화 상대자로 초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논문은 어떤 주제에 관한 해명이나 논증의 과정으로 읽히거나 또는 이 것의 선행작업인 올바른 이해나 해석으로 모아지지 않고, 다양한 것들이 방만하게 뒤섞여 나열되어 있는 시골 읍 단위 잡화상들처럼 힘이 없어 보인다. 논쟁 없는 책은 백화점처럼 세련된 모습을 갖출 수 있지만, 논쟁 없는 논문은 뚱뚱한 군인처럼 답답해 보인다. 이와 유사한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필자는 논문 주제와 관련된 국내․외 선행연구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행연구가 제시하는 입장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수행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이들과 필자의 작업이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야 하고, 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문에서 표현해야만 한다. 많은 연구자들이 특히 국내에서 이루어진 선행연구에 대해서는 폄하하면서도, 국외의 연구결과는 거의 번역에 가까운 인용을 하면서도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각주 표기 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히 지적 사대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의 학문발전 자체를 원초적으로 방해하는 경우다. 특히 국외에서 나온 이차문헌을 짧은 시간동안 소화할 수 없는 학생들의 경우, 국내 연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도 좋은 논문을 작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국내연구 성과를 애써 무시한 뒤, 외국의 어떤 특정한 대학자의 등뒤로 자신의 몸을 숨기는 경우다.


5. 모든 글 쓰기가 그렇듯이 논문도 정직과 절제의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이 점에서 각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먼저 각주나 참고문헌은 독자에게 논문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과 그에 대한 논쟁점에 대해서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필자는 각주를 통해서 자신의 글 속에 들어와 있는 타자의 소리를 자신의 소리와 구별해주고, 이를 통해서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를 정직하게 평가함으로써 연구자 집단의 연대성을 진작시킨다. 필자는 또한 논문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면서도 논의의 긴박성을 떨어뜨리는 잡다한 것들을 각주로 밀어냄으로써 절제된 글을 짜임새 있게 써갈 수 있다. 이는 각주와 주석이 함축하고 있는 배제의 논리에 대해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주가 논문 쓰기의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는 이유다.


6. 많은 논문들은 <본문>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거나 또는 구체적으로 논증하지 않은 내용을 <머리말>이나 <맺는 말>에서 서술한다. 이는 실제로 필자가 입증한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주장하려는 단순한 자기 의욕의 표현일 뿐이며, 비록 그것이 논문의 주된 내용과 무관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글 자체의 긴장을 처음부터 흐트러뜨림으로써 논문을 비전문적 넋두리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논문을 쓰는 필자는 절제되지 않은 주장을 논문의 이곳 저곳에 슬쩍슬쩍 삽입해서는 안된다. 특히 <머리말>에서 본문의 내용을 부풀리는 주장을 해서도 안되며, 세밀한 선행 논의 없어가 없는 내용을 <맺는 말>에서 거론해서도 안 된다. 논문은 웅변이 아니라 논변이 중심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이처럼 뭔가 그럴싸한 주장을 암암리에 끌어오는 것은 자신감 없는 초보자들의 무절제한 용감성일 뿐이다. 논문은 아주 작고 사소한 주장을 세밀한 곳까지 추적하면서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지, 크고 아름다운 주장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7. 논문은 비록 그것이 실천적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이론적 작업에 해당한다. 따라서 논문 속에 등장하는 관점과 주장들의 현실적 적용 가능성은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급하게 대답하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능동성이 없는 역사적 관점을 엄밀한 검토 없이 현실과 접목시키거나, 순수 이론적 차원의 사상실험을 구체적 현실과 혼동하는 것은 초보자들이 자주 범하는 대표적 실수에 속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2500년 전에 제안한 교육관을 다루면서 이를 성급하게 오늘날의 교육 현실과 접목시킬 수 있고, 나아가 우리가 직면해 있는 여러 가지 교육 관련 문제들을 해소하는 데에 중요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논문이 플라톤의 교육 이념과 이론이 부분적이지만 현실적인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한계와 비판되어야 할 부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의 교육 이론에서 오늘날 더 이상 현실성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이며, 반대로 훈고나 해석의 관심을 넘어서 현실적 능동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를 명확하게 규명해야만 한다. 만약 필자가 플라톤의 교육관을 현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평가하려고 한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공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앞서의 작업이 논문의 본래적 목적에 부합한다고 할지라도 논문의 완성도는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8. 석․박사 학위 논문은 필자가 그동안 쌓아온 학문적 노력의 성과물이다. 따라서 학위논문을 읽다보면 우리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경험한, 어쩌면 우리 주변에 현재하고 있는 좌절의 고통과 보이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외로움을 함께 볼 수 있다. 그런데 니체처럼 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현실이 아니라 당위로만 전달된다. 비록 피로 글을 쓰지는 못할지라도, 그러나 머리에 쥐가 날 정도의 고통은 겪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위논문 발표 장에서 접하게 되는 많은 논문 속에 쉽게 고쳐질 수 있는 여러 가지 형식적 오류가 산재한다. 대부분의 논문이 이미 여러 번에 걸쳐 교정 또는 수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오류가 교정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공부하는 사람들끼리의 연대 의식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전공분야를 불문하고 서로의 글을 읽어주는 문화가 우리들 사이에서 보다 활성화되어야만 한다. 연대성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함께 그리고 좀더 탄탄하게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보다 많은 사람에 의해서 읽혀진 논문일수록 완성도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9. 우리가 흔히 보게되는 오류들을 나열해 보면 1) 동일한 내용의 반복적 서술이 많으며, 2) 단락이 내용의 전개에 따라 합리적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3) 인용문의 내용과 양이 부적절하며, 4) 각주의 위치와 내용이 적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으며, 5) 참고문헌의 선택과 표기가 자연스럽지 못한 경우가 있다. 이런 형식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논문들은 대개 6) 서술 과정의 긴밀한 논리적 연관성을 결여하는 경우고 많고 그 때문에 논리적 비약이 심한 경우가 많고, 그 결과 7) 진짜 필자의 것과, 필자가 원하는 것의 혼동, 또는 필자가 입증할 수 있는 것과 입증하고자 하는 것의 혼동, 그리고 필자가 만들어낸 것과 다른 누군가 가공해준 것을 혼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10. 논문들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필자가 중성화되어 되어버린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니체는 있으나, 이들과 대화하는 필자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논문을 쓰고 있는 필자는 담론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필자가 비록 플라톤이나 칸트의 사상에 동의하고,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에 만족한다고 할지라도, 논문을 통해서 나타나는 플라톤과 칸트는 필자의 참여자적 관점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것이어야만 한다. 논문을 쓰면서 자기를 텍스트 뒤로 숨기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논문에서 필자가 텍스트 뒤에 숨어있는 경우 필자는 자기가 쓰고 있는 말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구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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